8 June 2011

‘대장균의 추억’

[강기자의 과학카페]<33>장출혈성대장균 공포

2011년 06월 07일

대장균 덩어리의 전자현미경 사진(1만 배). 대장균은 길이 2마이크로미터, 폭 0.5마이크로미터의 짧은 막대 모양이다. (사진 ARS)

생명과학을 전공한 대학원생 열에 아홉은 대장균을 키우는 게 일상 업무일 것이다. 보통 대장균 대신 학명의 약자인 ‘이콜라이(E. coli)’라고 부르는데 정식 학명은 ‘에셔리키어 콜라이(Escherichia coli)’로 대장균을 처음 발견한 독일의 미생물학자 테오도르 에셔리히의 이름에서 속명을 따왔다. 종소명 콜라이는 대장(大腸)이라는 뜻이다.

대장균을 키우려면 먼저 배지를 준비해야 한다. 증류수가 담긴 삼각플라스크에 각종 영양분이 골고루 들어있는 효모추출물과 설탕을 넣고 잘 섞어준 뒤 고압멸균을 한다. 그러면 화이트 와인 샤르도네가 연상되는 노르스름한 투명한 액체가 된다. 여기에 조심해서(다른 균이 오염되지 않게) 페트리접시에 있는 대장균 콜로니(세포 하나에서 증식한 덩어리)를 따서 넣어준다.

그리고 삼각플라스크를 배양기에 넣는데 배양기의 온도는 37℃로 바로 우리 체온이다. 이 온도에서 대장균이 가장 잘 자라기 때문이다. 다음날 배양기를 열어 삼각플라스크안의 액체가 뿌여면 대장균이 잘 자란 것이다. 이제 하기 싫은 일이 남았다. 배양액을 통에 담아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려 세포를 모을 때 맡을 수밖에 없는 상당한 ‘구린내’ 때문이다.

기자도 햇수로 만 4년을 일주일에 한 두 번꼴로 이 일을 했지만 도무지 적응이 안 됐다. 그러고 보면 화장실 냄새는 사실 우리 몸 때문에 나는 게 아니라 장에 사는 대장균을 비롯한 장내미생물 때문이라는 게 실감난다. 물론 요즘은 장내미생물이 없다면 사람이 살 수가 없다는 게 밝혀져서 장내미생물도 우리 몸의 일부라는 관점이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생명과학의 감초

실험실에서 구린내 나는 대장균을 키우는 이유는 물론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분자생물학으로 대표되는 현대 생명과학의 발달은 대장균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다. 대장균 자체도 아마 가장 많이 연구된 박테리아이겠지만 생명과학 연구자 대다수는 대장균 자체가 연구대상이 아니라 ‘유전자재조합’이라는 실험을 할 때 ‘수단’으로 대장균을 이용한다.

즉 대장균에는 본래의 게놈 말고도 플라스미드라고 하는 고리형태의 작은 DNA가 있는데 이 플라스미드를 이용해 디자인한 유전자를 세포 안에 넣어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에 형광 꼬리표를 달거나 특정 염기서열을 바꿔치기해 변형 단백질 유전자를 만드는 등 다양한 조작을 한 플라스미드를 대장균 배지에 넣어준 뒤 화학적 또는 전기적 처리를 하면 이 플라스미드가 약해진 세포벽을 뚫고 대장균 안으로 들어간다. 플라스미드를 받아들인 대장균은 세포분열을 하면서 플라스미드도 복제하기 때문에 결국 충분한 플라스미드를 얻어 다음 단계의 실험을 진행할 수 있다.

박테리아가 유전자를 교환하기 위해 서로 접합한 장면을 담은 전자현미경 사진. (사진 Charles C. Brinton Jr.)

그렇다면 대장균은 과학자들이 실험을 하라고 플라스미드를 갖고 있었던 걸까. 물론 그럴 리야 없다. 플라스미드는 대장균이 급변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발한 생존전략의 산물이다.

유전자의 이동이라면 우리는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주는 수직이동만을 떠올리지만 주로 무성생식을 하는 박테리아의 세계에서는 수직이동의 변수는 돌연변이 뿐이다. 오히려 수평이동이 새로운 유전자를 얻는 방법인데 그 매개체가 바로 플라스미드다. 즉 박테리아 사이에 나노파이프를 연결해 플라스미드를 주고 받는데 이를 ‘접합(conjugation)’이라고 부른다.

새로 개발된 항생제가 박테리아를 전멸시키다가도 우연히 그에 대해 저항성이 있는 유전자를 갖는 돌연변이 박테리아가 나올 경우 이 유전자가 접합을 통해 주변 박테리아로 이동하면서 항생제 저항성을 갖는 박테리아가 급격히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유전학의 아버지인 멘델이나 진화론의 대부 다윈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무릎을 쳤을 것이다.

●장출혈성대장균 공포 확산

최근 독일을 중심으로 보고되고 있는 장출혈성대장균 사태도 유전자의 수평이동이 문제일 것이다. 평범한 또는 병원성이 약한 대장균이 누군가로부터(대장균과 가까운 박테리아일 가능성이 크다) 독소 유전자를 전달받아 맹독성으로 바뀌었을 것.

사실 평범한 대장균은 사람의 대장에 거주하면서 비타민K2를 합성해 공급해주고 다른 유해세균이 들어오면 무찌르는 보초병 역할도 하는 유익균이다. 그런데 이처럼 이상한 유전자를 전달받으면서 병원성으로 바뀌는데 그 종류만 200여 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외국을 여행하다보면 종종 배탈이 나는데 많은 경우 그곳 대장균이 장에 들어와 탈을 일으키는 경이다. 주로 설사를 일으키는 장독성 대장균으로 현지인들은 이런 변형에 저항성이 있어 그런 현상이 없다. 인구집단에 따라 대장균의 병원성 여부(대체로 심각하지는 않다)가 결정되는 셈이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건 ‘장출혈성 대장균(Enterohemorrhagic E. coli, 줄여서 EHEC)’로 이 병원균은 베로톡신(verotoxin)이라는 치명적인 장독소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 장출혈뿐 아니라 신부전 증세까지 일으켜 심하면 목숨을 잃는다. 현재 장출혈성대장균으로 22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장출혈성대장균의 대명사인 O157:H7의 독소인 베로톡신은 친척 박테리아인 시겔라의 시가독소 유전자가 박테리오파지(박테리아에 감염하는 바이러스)를 통해 대장균으로 이동한 걸로 밝혀졌다. 박테리오파지의 전자현미경 사진.

현재 유행하고 있는 병원성 대장균은 O104:H4. 우리가 기억하는 유명한 장출혈성대장균은 O157:H7(보통 O157로 불린다)이다. 이 기호들은 혈청반응의 종류로 대장균 표면의 생체분자의 구조(O는 지질다당류, H는 편모)를 항원으로 해 형성되는 항체에 따라 명명됐다.

이 가운데 O157:H7은 2000년대 들어 세계 이곳저곳에서 워낙 많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미국에서는 지금도 매년 6만 여명이 감염돼 50여명이 사망한다고 한다) 꽤 많이 연구된 변종이다. 흥미롭게도 O157:H7의 독소인 베로톡신은 친척 박테리아인 시겔라(Shigella)의 시가독소(Shiga toxin)과 비슷하다고 한다. 연구결과 시겔라의 시가독소 유전자가 박테리오파지(박테리아에 감염하는 바이러스)를 통해 대장균으로 이동한 걸로 밝혀졌다.

현재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는 장출혈성 대장균 O104:H4는 상대적으로 알려진 게 없어 더 불안한데 그 독성은 O157:H7를 능가한다고 한다. 중국 선전에 있는 베이징게놈연구소(BGI)는 지난 2일 이번 O104:H4 변종의 게놈을 분석해 그 결과를 발표했다(3세대 게놈분석장비를 써서 3일 만에 해독과 분석을 끝냈다고 한다!).

이 녀석의 게놈 크기는 520만 염기쌍으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심각한 설사를 일으킨 변종인 EAEC 55989 대장균과 염기서열이 93% 동일하다고 한다(박테리아에서 93%는 매우 높은 유사성이다). 이 박테리아가 장출혈을 일으키는 독소 유전자와 여러 항생제 저항성 유전자까지 유전자 이동을 통해 획득해 ‘슈퍼 독성 변종(Super-Toxic Strain)’이 된 걸로 추정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O104:H4의 병원성이 처음 보고된 사례는 우리나라라고 하니(2004년 발견돼 2006년 ‘연세 메디컬 저널’에 발표) 이 녀석의 사연이 밝혀지려면 꽤 많은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지금으로서는 음식 조심하고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면서 사태를 지켜볼 도리밖에.

강석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suk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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