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자의 과학카페 45
2011년 09월 21일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도 그렇지만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도 그냥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마치 ‘논어’나 ‘주역’처럼 후세의 사람들이 주석까지 붙여가며 ‘연구’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홈즈 권위자라는 변호사 레슬리 클링거의 ‘주석 달린 셜록 홈즈’(주석이 무려 1000개가 넘는다)는 한글판도 나와 있다.
‘노우드의 건축업자’(1903년 발표)라는 제목의 단편은 한 은퇴한 건축업자가 살해된 것처럼 꾸며 젊은 시절 자신의 프로포즈를 거절한 여자의 아들에게 살인자의 누명을 뒤집어씌우려 하지만 홈즈 때문에 결국 실패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건축업자가 결정적인 증거로 이용하는 게 피에 남겨진 지문인데 아래는 건축업자의 꾀에 넘어간 경위와 홈즈의 대화다.
“사람들의 엄지손가락 지문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아시죠?”(경위)
“그렇다고들 하더군요.”(홈즈)
지금은 수사에 지문이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는 게 당연시 되지만 코난 도일이 홈즈를 쓸 때만해도 이처럼 지문의 중요성이 막 인식되는 시기였다. 이 이야기 뒤에 클링거는 ‘셜록 홈즈와 지문’이라는 별도의 글을 덧붙여 지문이 수사에 쓰이게 된 과정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즉 1858년 인도(당시 영국령)의 치안관인 윌리엄 허셜이 인도 사람들이 계약을 할 때 지문을 찍게 했다는데 이때 그는 지문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에서 의사로 일하던 헨리 폴즈는 선사시대 토기에서 옛 사람의 지문을 발견한 뒤 지문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술잔의 남은 지문과 학생들의 지문을 비교해 술을 훔쳐 마신 ‘범인’을 찾기도 했다.
폴즈는 1880년 10월 28일자 ‘네이처’에 실은 논문에서 “피 묻은 지문이나, 도자기와 유리잔 등에 지문이 있으면, 그것으로 범인의 신원을 알아낼 수 있다”고 썼다. 한편 허셜도 그 다음달에 ‘네이처’에 지문을 서명처럼 쓰는 방법에 대한 논문을 게재했다.
지문이 진짜 범인을 찾는데 쓰인 첫 사례는 1892년 아르헨티나의 경찰 후안 부세티치가 문에 묻은 지문을 채취해 두 아들을 살해한 어머니를 검거한 일이다. 런던 경찰국이 지문 체계를 채택한 것은 1901년부터다. 그렇다면 손가락 끝에는 왜 지문이 있을까.
●지문, 왜 있을까?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의 인류학자 니나 야블론스키 교수는 지난 2006년 펴낸 책 ‘Skin(피부)’에서 손가락, 발가락 끝의 지문은 영장류가 나무를 잘 타기 위해 진화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피부 표면의 미세한 굴곡이 나무을 잡을 때 미끄러지는 걸 방지한다는 것. 참고로 영장류의 손톱 발톱이 넓적한 것도 생존에 중요한 손가락 발가락 끝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진화한 결과다.
한편 과학저널 ‘사이언스’ 2009년 3월 13일자에 실린 논문은 지문의 기능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즉 지문은 미끄럼 방지 기능 보다는 촉각을 예민하게 하기 위한 구조라는 것. 연구자들은 말단의 신경 역할을 하는 촉각센서를 만든 뒤 하나는 표면이 매끄러운 재질로 감싸고 하나는 손가락 끝 피부처럼 요철이 있는 재질로 감쌌다. 그리고 유리 표면을 훑게 했을 때 전달되는 신호를 비교하자 요철이 있는 재질일 때 감도가 최대 100배까지 민감해짐을 확인했다.
연구자들은 특히 섬세한 질감을 느낄 때 지문이 큰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즉 손끝이 물체의 표면을 지나갈 때 진피에 있는 신경의 말단인 파시니 소체가 진동의 형태로 감지하는데 이 과정에서 지문이 신호증폭기 역할을 하는 셈이다.
손을 쓰는 영장류 가운데서도 최고봉인 인류가 뚜렷한 지문을 갖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진화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지문 유전자 찾았다
지난 2007년 스위스의 한 여성은 미국에 입국하려다 제지당했다. 손가락에 지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여성은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무지문증(adermatoglyphia)’이었던 것. 이 얘기를 듣고 흥미를 느낀 스위스 바젤의대의 피부학자 피터 이틴 교수는 이 여성의 가계를 조사해봤다. 그 결과 친척 가운데 무지문증인 사람이 9명이나 됐다. 이들 모두는 태어나면서부터 지문이 없었다.
무지문증이 유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틴 교수는 이 증상에 ‘입국지연병(immigration delay disease)’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이런 사람들은 지문 날인을 요구하는 나라에 들어갈 때 애를 먹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텔아비브대의 엘리 스프레셔 교수팀과 함께 ‘지문 유전자’ 사냥에 들어갔다.
그 결과 마침내 무지문증은 SMARCAD1이라는 유전자에 변이가 생긴 결과라는 사실을 발견해 ‘미국인간유전학저널’ 8월호에 발표했다. SMARCAD1 유전자는 피부에서만 발현되는데 그 기능은 아직 모르는 상태다. 연구자들은 이 유전자가 피부 세포가 접히는 배열을 하는데 관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문은 사람마다 다르다. 흥미롭게도 일란성 쌍둥이도 지문은 서로 다르다. 지문 패턴 형성에는 선천적인 요인과 후천적인 요인이 함께 작용하는 듯하다. 지문은 임신 24주쯤이면 거의 완성돼 그 패턴이 평생 동안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 손끝의 지문에는 어머니 뱃속 시절의 추억이 새겨져 있는 셈이다.
강석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sukki@donga.com
22 September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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