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January 2011

나의 (유학기 아닌) 유학기

2001년 09월 19일

이 글의 제목을 "유학기 아닌 유학기"로 붙인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외국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는 유학 경험이 없다. 1987년에 유학을 준비했지만, 집안 사정상 곧 그만두었다. 대신 1988년 국내 박사과정에 진학해서 90년에 수료를 하고, 몇 개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를 하면서 논문 주제를 생각하고 있던 차에 당시 지도교수님이 외국에 나가서 외국 교수의 지도하에 영어로 논문을 쓸 것을 생각해보라고 권했고, 나도 한국에서 적당히 논문 써서 학위 받고 폼이나 잡는 그런 사람이 되긴 싫어서, 그러겠다고 했었다.

이런 저런 조건을 생각하고, 몇 사람을 접촉한 다음에 토론토 대학의 부크왈드(J.Z. Buchwald)교수가 논문을 지도해 주겠다는 승낙을 받았다. 1991년 2월 24일 토론토 땅을 밟았다. 내 비자는 1992년 12월로 그 기간이 2년 남짓되었었다. 2년안에 논문을 쓰고 한국에 돌아간다는 야심찬 계획을 안고 왔다. 유학생이 아닌 방문학생의 자격이었다. 그런데 당장 세상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유학 아닌 유학을 가다
내가 부크왈드 교수를 지도교수로 택했다는 얘기를 듣고 지금 과기대에 있는 K선배가 극구 말렸던 기억이 난다. 그 사람은 너무 젊고 야심만만해서, 너 같은 방문학생한테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토론토대학 과학사학과에 와 보니, 그의 얘기가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연구 업적이 좋아서 토론토대학에 재직했던 18년 중 10년 가까이를 (연구)휴가로 보냈던 사람이었고, 18년간 단 두 명의 박사 학생을 가르쳤을 정도로 학생 선발에 까다로웠고, 또 학생을 받는데 별로 관심도 없었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의 애제자였고, 하버드에서 과학사 석박사를 삼 년 반만에 마치곤 26에 토론토대학에 교수로 부임했을 정도로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었다.

내가 겪은 첫 문제는 영어였다. 말은 고사하고 들리지도 않았다. 리포트를 써내야 했는데, 영문 타자도 칠 줄 모르는 형편이었다. 그는 내게 바로 논문을 쓰기 시작하라고 했고, 2주일에 하나씩 짧은 리포트를 내라고 요청했다. 영작을 못하는 것은 물론, 타자도 못치는 사람한테 리포트를 내라니! 말을 잘 못하니, 사정을 하소연할 수도, 한국에서처럼 적당히 둘러대고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시키는 대로해야 했다. 논문의 챕터를 6개로 잡고, 각 챕터에 4-6개의 섹션을 잡아보았다. 그리고 섹션 하나씩을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수요일 아침에 격주로 만났는데, 월요일에 보고서를 그의 mailbox에 넣어놓아야 했다. 내가 2주 동안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서 보고서를 준비해도, 그는 문제점을 찾아내고, 토론시간에 나를 질타했다. 그는 의기양양했고, 나는 토론이 끝나고 학교를 나올 참이면 참담했다. 그런데 조금 쉴 여유도 없었다. 다음주 보고서를 또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3페이지였던 내 보고서는 시간이 갈수록 두툼해졌다. 나중에는 15페이지, 20페이지 짜리 보고서를 격주로 내곤 했다. 그래도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비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예리했고, 99% 정확했다. (나는 딱 한 번 그의 비판이 정확하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칭찬을 받아본 기억은 거의 없다. 내 보고서를 놓고 토론하면서, 어느 순간 그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very interesting, very interesting..."이라는 낮은 감탄사가 나오면, 나는 그것이 그가 학생에게 해 주는 최고의 칭찬임을 새겨들어야 했다.

부크왈드교수는 다정다감한 선생이 아니었다. 내 논문이 끝날 때까지 내게 웃어준 적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어떤 일에 한번 몰두하면 방해받기를 싫어해서, 나는 연구실 밖에서 그가 일을 마칠 때까지 한없이 기다린 적도 종종 있었다. 그는 92년 8월에 MIT의 석좌교수가 돼서 토론토를 떠났는데, 91년 3월부터 92년 8월까지 약 1년 5개월간의 기간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를 가장 지적으로 자극했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건방진 얘기지만, 그제야 나는 학문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세계적인 학자"의 벽이, 그 수준이 어떤 것인지 처음 알았다. 장난이 아니었다. 그 사고의 깊이, 비판의 정확성, 분석의 예리함, 박식한 지식, 표현의 유창함... 이 모든 것은 나를 한없이 초라해 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나는 그와 조금 친해지고서 그에게 이런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너를 만족시키기가 너무 힘들다고.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얘기했던 것 같다. "나는 네가 뛰어넘어야 할 벽이다. 네가 알다시피 나라는 벽은 상당히 높고, 뛰어넘기 힘들다. 그런데, 너는 이점을 알아두어야 할 것 같다. 네가 나를 뛰어넘으면, 그 다음에 넘어야 할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나를 만족시키면, 다른 사람들은 자동으로 만족시키는 것이다."

무협지에 보면 고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깊은 산중에서 무술을 닦은 청년이 처음으로 강호에 나가 자신의 실력에 깜짝 놀라듯이,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캐나다에 온지 1년만에 IEEE Electrical History Fellowship이라는 경쟁이 세고 권위 있는 미국 장학금에 응모했는데, 이를 덜컥 받게되었다. 생각도 못하던 일이었다. 당시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는데 천문학적인 돈 미화 ,000을 움켜쥐었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런데 이는 내 크레딧(credit)덕분은 아니었다. 연구 계획서를 냈지만, 무엇보다 나를 주의 깊게 보고 있었던 부크왈드 교수의 추천서가 강력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부크왈트 교수도 내 자신도 깜짝 놀랐던 일이 하나 생겼다. 한국이라는 인문학의 불모지에서 온 영어도 잘 못하는 학생이 92년 미국 과학사학회에서 수여하는 슈만 상(Schuman Prize)을 받은 것이다. 이 상 하나로 나는 졸지에 star가 되었다.

아이덴티티의 위기와 슈만 상
슈만 프라이즈(Schuman Prize)는 미국 과학사학회에서 박사과정 학생을 대상으로 논문을 공모, 심사해서 매년 최우수논문 한 편에 수여하는 상이다. 역사가 꽤 오래되었고, 외국인은 영국학생이 두어 번 상을 탄 것이 전부였다. 이 상은 프린스턴, 예일, 하버드와 같은 미국 명문대학의 박사과정학생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내가 머물고 있었던 토론토대학 과학사학과는 당시 25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으나, 아직 슈만 상을 탄 학생을 내지 못한 형편이었다.

1992년 초 내가 슈만 상에 응모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무렵, 나는 크레딧의 위기(crisis in credit), 아이덴티티의 위기(identity crisis), 그리고 경제적인 위기(economic crisis)라는 일련의 위기를 겪던 중이었다. 이 셋은 물고 물리면서 연관되어 있었고, 나를 지치게 하고 진을 쑥 빼놓기에 충분했다.

한국에 있을 때 서울대 박사과정에 있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고 하면 어디 가서 대접은 못 받아도 천대는 받지 않을 정도의 지적, 사회적 크레딧은 가지고 있었다. 나름대로 진보적인 사회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었고, 원고 청탁도 심심지 않게 들어왔으며, 강연요청도 꽤 있었다. 강사료와 이런 잡수입으로 결혼 뒤에도 근근히 생활을 할 정도는 됐다. 학술지에 논문을 세 편 출판했을 정도로, 연구에도 게으름을 피지 않았었다.

토론토에 발을 디디면서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내가 한국에서 쌓았던 크레딧이 -- 박사과정 수료, 괜찮은 평가, 논문, 사회운동 등 --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내게 하는 질문은 "너도 한국에 있을 때 데모했니?"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나를 과대 평가해 주길 바라긴커녕, 내가 한국에서 이룬 것만이라도 제대로 평가해 주길 바랬지만 소용없었다. 한국의 학계가, 특히 인문사회과학이 너무 국내에서만 자족했던 그 대가를 유학생들 개개인이 겪는 셈이었다.

여기에 아이덴티티의 위기가 가세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질 못했다. 내가 "나는 '성욱'(Sungook)이다"고 하면 '성욱'을 알아듣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뭐? (Pardon me? I'm sorry?)"를 두세 번은 들어야 했고, 그러고도 '성욱'을 발음하는 경우가 없었다. "썬국"이 보통이었고, "덷윽" "썽국" 등 가지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외우기도 쉽고 부르기도 쉬운 성을 따서 나를 그냥 "홍(Hong)"이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이는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성(last name, family name)은 군대에서나, 또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에 경멸조로나 부른다는 것이었다. 이를 알고 이름을 다시 "성욱"으로 바꾸는데, 1년 이상 걸렸다.

예상치 않던 사건은 항상 생기는 법이지만, 그것이 타국에서 생겼을 경우 그 충격은 더 심했다. 우리 부부는 유학 첫 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당시 학교에서 가까운 허름한 아파트에 살았는데, 난방이 잘 안돼서 겨울을 너무 춥게 보냈던 생각이 난다. 돈을 절약하고 또 절약할 때라서, 1불 50센트 하는 피자를 한 조각 사와서, 나와 내 처가 갈라 먹는 게 가장 흐뭇한 시간이었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서 큰 수퍼마켓에서 유효기간이 지난 음식을 싸게 파는 것을 사서 먹었던 경험도 지금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

이런 와중에 나는 "어떻게 북미에서 내 크레딧을 쌓을 수 있을까"라는 숙제를 풀어야 했다. 내 크레딧은 제로 상태였다. 그렇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크레딧을 쌓는 것은 다른 학생들과의 경쟁이었고, 이미 다른 학생들이 +(플러스) 크레딧을 가진 상태에서 보통 방법으로 경쟁을 하면, 부익부 빈익빈의 원칙에 따라 내가 그들을 따라 잡기란 불가능했다. 나로서는 뭔가 혁신이, 도약이 필요했다. 이때 1992년 슈만 상 공고를 보고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무릎을 쳤다. (이건 다른 얘기인데, 이런 경험 이후 크레딧(credit) 또는 크레더빌리티(credibility)란 개념은 내 과학사 연구에서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내가 영문으로 출판한 논문 중엔 "Styles and Credit in Early Radio Engineering"란 논문도 있고 "Syntony and Credibility"란 논문도 있다).

마감은 5월말이었고, 시간은 별로 없었다. 일단 내가 썼던 학위논문 중에 지도교수의 칭찬을 들었던 2 섹션을 뽑아서 논문으로 만들었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출판을 위해 쓴 논문인데 읽고 영어를 고쳐달라고 부탁했고, 서울에 있는 지도교수에게만 한 부 보내면서 슈만 상에 응모할 논문이라고 귀띔했다. 서울에서 날아온 충고는 "슈만상은 경쟁이 워낙 세니까, 너무 시간 많이 쓰지 말라"는 약간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간신히 5월말에 맞춰서 응모를 하고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6월말 경에 심사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나는 "혹시, 내가..."라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편지를 열어보았는데, 서울대학교란 대학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내게 거기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라는 증명서를 첨부해서 보내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기가 턱하니 막혔다. 재학증명서를 팩스로 받아 한부 보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10월이 지나도 연락이 없자 떨어진 줄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기다렸는데 맥이 빠졌다. 그러다 11월 중순의 어느 금요일 오후에 학교에 들렸다가 웬 편지가 한 통 와있는 것을 보았다. 수신인을 보니까, 미국과학사학회였다. "휴.. 또 회비 내라는 편지구나.."라고 생각하고, 편지를 뜯어서 첫 줄을 읽는데, 갑자기 멍해진 채로 그 다음 줄이 눈에 들어오질 않는게 아닌가. "Dear Sungook Hong: I am very pleased to inform you that your essay... has been awarded the Schuman Prize. This prize is open to graduate students ..."

"이야!" 환희의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연구실에 남아있던 학생들을 일일이 붙잡고 편지를 보여주고, 악수도 하고 포옹도 했다. 교수들 연구실을 두드려서, 남아있는 교수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저녁 6시에 처를 도서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어떻게 하면 제일 놀라게 할까 궁리를 했다. 음...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참 내, 오늘 정말 이상한 날이야. 글세 학교에 가보니 이런 이상한 편지가 와있잖아. 한 번 읽어 볼래?"라고 하면서 그녀에게 편지를 건네는 방법을 생각했다. 나는 정말로 이렇게 했고, 처를 놀라게 한 대신 길에서 몇 대 맞았다.

수상식은 12월에 있었던 미국 과학사학회에서 있었다. 500명의 회원이 모인 연회장에서, 사람들을 내려다 보는 테이블(high table)에서 뭐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지도 모르게 밥을 먹고, 내 차례가 돼서 상을 받고, 간단한 소감을 말했다. 영어에 자신이 없어서 100번은 더 넘게 외우고, 화장실에서도 연습을 했던 짧은 소감이었다.

학생으로서 나는 훌륭한 선생 두 분을 둔 행운을 누렸다. 한 분은 서울대학교의 김교수인데, 그는 물리학도였던 내게 역사학자로서 읽고, 생각하고, 쓰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다른 분은 부크왈트 교수인데, 그는 사고와 글에서 -- 내가 달성하지 못했지만 -- 항상 최고의 수준을 요구함으로써 나를 자극했다. 나는 이분들에게 감사한다.

영어와 수업에 대한 기억들
내가 서울서 대학과 대학원에 다니던 80년대는 반미감정이 몹시 격앙된 시절이었다. 미국이 한반도 분단의 주범이라는 일반론에, 미국이 광주사태를 용인하고 전두환 정권을 지지했다는 당시의 상황 인식이 겹쳐서, 골수 운동권이 아니더라도 "미제국주의"란 얘기가 낯설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 부산 미문화원 방화가 다 이때 일이었다. 외국인 선생에게 영어회화를 배우러 다니는 것은 유학을 준비하는 출세지향적인(?) 학생이나 조금 덜떨어진 애들이 하는 일로 치부하던 시절이었다.

영어 공부를 하나도 안 하다가 나이 서른이 넘어서 캐나다에 도착하고 나니, 공항에 입국수속부터 식은땀이 흐르고 눈앞이 아찔아찔했다. 읽기는 어느 정도 했는데, 듣기와 말하기는 젬병이었다. 영어 때문에 고생한 에피소드에 대해선 책을 한 권을 써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한가지 예를 얘기해 보자. 이곳에서 신문을 사면 광고지(flyer)들이 잔뜩 들어있는데, 그 광고지에서 "문을 부수는 (따는) 기구"를 대대적으로 선전함을 보고 의아했던 경험이 있다. '왜 <문을 부숴서 여는 장치>가 필요할까..'를 생각하다, '아마 사람들이 열쇠를 잃어버렸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자동차 같은 데 이 기구를 가지고 다니나 보다'라고 짐작했었다. 하도 선전을 많이 하기에, '이렇게 선전을 많이 하는데 나도 하나 사야하지 않을까'라고까지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는 "Door Crasher!!"를 엉뚱하게 해석한 것이었다. ("가격이 너무 싸서, 사람이 몰려 문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떨어지기 전에 빨리 와서 사세요!!"라는 의미의 광고문구다.)

수업을 같이 듣던 학생이 하루는 내게 "너 이 수업 어떻게 찾았니"라고 물어보았다. 난감했다. '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음.. 그러니까... 역사과에 가서... 수업안내서를 봤는데... 거기서 재밌어 보이는걸 보고... 교수한테 가서.. 청강해도 되냐고 했더니... 교수가 그래도 된다고 해서... " 그랬더니 그 친구가 씩 웃으면서, "넌 내 질문을 글자 그대로 해석했구나"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물었던 "How do you find it?"은 그냥 "너 이 수업 어떻게 생각하니?" 정도의 얘기였는데, 이를 "어떻게 찾았니"로 해석했으니...

"How come?"(왜? 어떻게?)을 "어떻게 왔니?"로 해석해서 끙끙댄 적도 있고, "Go for it"이 의미전달이 안돼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이를 물어본 적도 있었다. Zoo와 Jew를 구별해서 발음 못해서 "내일 동물원에 갈거다"는 얘기를 "내일 유태인에 갈거다"는 식으로 전달한 적도 있다 (z발음은 한글자음에 없다. 한가지 방법은 z이 롁보다 걁에 가깝다는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zoo를 "주-"보다는 "수-"로, reason을 "리즌"보다는 "리슨"으로 발음하는 게 알아듣기에 더 용이하다. reason을 리즌이라고 하면 region인줄 안다.) 한 번은 내 지도교수와 그의 연구에 대해 얘길 하다가 그가 내게 "너는 내 연구가 좋은 출판사에서 출판될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Don't you think...?)"라고 물었는데, 한국식으로 "아니... No..."라고 했다가, 큰 오해를 살 뻔한 적도 있다.

말이 이랬으니, 세미나 수업에 참여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나는 방문학생이어서 수업을 들을 의무는 없었지만, 이곳에 2년 체류하는 동안 다양한 수업을 듣고 견문을 넓히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첫해에 "빅토리아 사회"에 대한 대학원 과목을 들었는데, 첫 4주 동안 세미나 시간에 단 한마디 얘기도 못했었다. 20분 가까이 한 학생이 발제를 하고 토론을 하는 것이었는데, 2시간 토론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의(!) 말할 기회도 잡을 수 없었다. 자괴심과 스트레스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한 세미나" 한다고 자부했던 내가, 정말 참담한 기분이었다.

작전을 짰다. 어차피 토론 중간에 틈을 비집고 들어가긴 힘든 거, 발제가 끝나고 교수가 "자 이제 시작해 보지"라고 운을 떼면, 그 때 재빨리 첫 화두를 잡는 식으로 말을 꺼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는 유효했다. 무조건 첫 번째 얘기/코멘트/질문을 하는 식으로 첫 말을 꺼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2시간에 1-2분은 말하는 셈이 됐다. 이것만 해도 말을 못한다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엄청 줄었다. 나중에 한 학기가 다 갈 무렵에는 세미나 중간에도 한 두 번씩은 낄 수 있었다.

이것 가지곤 부족했다. 석사 2학년 수업이었는데, 내가 보기엔 별것도 아닌 애들이 "이빨" 하나로 폼잡는 것 같았다. 설욕의 기회를 얻어야 했다. 교수에게 간청을 해서, 세미나 발제를 한 학생과 공동으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학기 맨 마지막 세미나였다. 그 학생에게 접근해서, "네가 요약을 하라, 내가 질문을 만들게. 이런 식으로 역할을 나누자"고 했다. 그 학생이 20분 동안 책 한 권을 요약하고, 내가 5분 동안 토론주제에 대해 얘기를 하는 식이었다.

내게 주어진 기회는 단 5분이었다. 이 5분 동안, 그곳에 모인 학생들은 물론 교수를 탄복시키는 어떤 것을 만들어 내야 했다. 사람들이 "아!"하고 감탄할 수 있는 무엇을 만들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나를 괴롭혔다. 책을 꼼꼼히 읽고, 큰 주제를 잡아내고, 저자의 주장을 분류하고, 이 주장에서 특히 독창적인 것을 끄집어내고, 문제점을 찾아내고, 이를 내가 읽은 다른 것과 비교하고, 이렇게 추려진 핵심을 중층적으로 엮고 또 엮어서, 토론 주제 5개를 만들어 냈다. 발제자의 발표가 끝나고, 내가 5개의 질문을 읽었다. 하나씩 읽을 때마다, 사람들의 분위기가 달라짐을 느꼈다.

질문을 다 던지고 나니, 방이 조용했다. 교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 질문들 가지고 한 학기 수업을 해도 좋겠다." 성공이었다. 한 학기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단번에 풀리는 순간이었다. 이 발제 이후 그 교수로부터 추천서를 비롯한 다른 도움을 몇 번 받았다. 그때 같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을 이후에도 캠퍼스에서 가끔 만나곤 했는데, 이들로부터 "네가 그때 했던 발제가 정말로 인상 깊었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내가 불과 3년 후에 토론토 대학의 교수가 됐다는 소식을 이 교수에게 전했을 때, 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후 나는 다른 수업을 들을 때에도, 내가 잘 할 수 있는 곳에서 (발제, 리포트 등)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애썼던 것 같다.

잠간 다른 얘기: 유학생들을 위한 한가지 충고
나는 지금은 교수의 입장에서 대학원생을 선발하는 일에 관여도 하기도 한다. 인문사회과학으로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한가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곳 교수들이 외국학생의 (특히 동양학생의) 입학 지원서를 볼 때 그 학생이 영어를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먼저 본다는 것이다. 토플이나 GRE같은 점수 이외에는 이를 평가할 방법이 없으니, 이런 점수를 잘 받는 것이 (특히 학점이 좀 안 좋을 때) 중요하다.

이에 덧붙여서,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교수들과 친분을 쌓아두고, 이들로부터 추천서를 받는 방법도 고려해봄직하다. 특히 유학가면서 바로 TAship(조교 장학금) 등을 노리는 학생은,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으로부터 "이 학생은 TA로서 세미나 지도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 실력이 있다"는 애기가 담긴 추천서를 받아내면 무척 유리하다.

두 번째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유학을 와서 영어가 모국어인 학생들과 경쟁을 할 때 "잘 할 수 있는 곳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다. 한국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 문법을 잘 익혔기 때문에, 말하기 보다 쓰기가 괜찮다. (한국 학생은 시험에도 강하다.) 세미나 시간에 20-30분 얘기하려고 기운빼기 보다는, 좋은 페이퍼를 쓰는데 총력을 다하라는 식이다.

페이퍼나 세미나 발제와 같은 것은 자기의 능력을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다. 이런 기회가 10번이고, 20번이고 오는 것이 아니다. "기회는 찬스다"(?)는 말처럼,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백분 이용하는 게 중요하다. 강한 인상을 동료학생과 특히 교수에게 심어 주어야 한다. 그저그런(dull)한 요약을 길게 하는 것 보다,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 무엇"을 생각해내려고 애써봄직하다. 다른 학생들이 2만큼 준비한다면, 5, 아니 10만큼 준비하면 된다.

항상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야심이 있는 학생이라면 지도교수는 그 분야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사람을 택해보도록 하라. 연구의 첨단(research frontier)에 있는 사람 밑에서 한 3-5년 구르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공이 엄청나게 는다. "식당개 3년이면 라면을 끓인다"는 얘기가 맞다. 이런 교수와 연구하다 보면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것이 어떤 작업이라는 감이 생긴다. 최고봉을 넘고 나면, 더 넘을 봉우리가 별로 없다. 반면에 남들이 만들어 놓은 지식의 뒷치닥거리를 하는 사람 밑에서 공부를 하면, 논문을 쓰고 졸업하기는 쉬울지 몰라도, 그 다음에도 첩첩산중이다. 잘못하다가는 자신의 실력이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고 똥폼만 잡는 학자가 되기 딱 십상이다.

대게 유명한 교수들은 바쁘고, 학생 선발에 까다롭고, 그 밑에서 공부하겠다는 좋은 (서양) 학생도 많다. 자기가 원한다고 이런 지도교수를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럴 경우 수업을 들으면서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이런 교수가 "언제 한 번 만나서 얘기해보자"고 할 때는, 그것이 두 번 다시 돌아오기 힘든 기회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관심과 연구 계획을 일단 글로 써서 딸딸 외우고, 교수의 예상 질문을 만들고, 이에 대한 자신의 답을 만들어서 외우고 갈 정도로 준비를 해야 한다.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 된다.

케임브리지 여행과 서양에 남겠다는 결심
공부를 하다보면 다른 학자들의 글을 접하게되고, 이들과 편지를 (지금은 전자메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연구에 대해 얘기하다가 친구가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런 사람들 중엔, '나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이 정도는 되겠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태반이지만, '아, 나는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이런 연구는 못할 것 같다'고 나를 초라해지게 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대학에서 교수를 하는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학자가 아닌 것이다.

다시 무협소설 얘기를 하자면, 검객들이 몇합을 겨루어보면 상대가 고수인지 아닌지 금방 아는 얘기가 있듯이, 같은 분야를 전공하는 학자들 사이에도 이를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어떤 학자가 내 연구나 제 삼자의 연구에 대해 코멘트를 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학문적 사고의 깊이를 잰다. 조금 뻥을 치자면, 한 10분 얘기해보면 그 내공을 얼추 잴 수 있다. (이걸 아는 것도 내공이 쬐끔은 있어야 한다. 원래 하수들이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천방지축 까부는 것은 무협소설이나 학계나 비슷하다).

유명한 학자들 주변에는 전설적인 얘기가 많다. 93년 초,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방문학생으로 한 학기 동안 머물렀던 이유는 그곳 과학사학과에 재직하는 새퍼(Schaffer)라는 교수와 함께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섀퍼는 1985년, 스트븐 새핀(Steven Shapin)이라는 과학사회학자와 <리바이어던과 진공펌프 (Leviathan and the Air-Pump)>라는 책을 출판한 사람이다. 다른 문제작들이 그렇듯이 이 책은 극찬과 혹평, 찬탄과 비난을 함께 받았고, 1980년대를 통해 과학학(science studies)분야의 최고 문제작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이 문제작을 출판했을 때 그의 나이가 불과 29이었다. 아니, 그는 학부 2학년이던 20살 때부터 전문 학술지에 논문을 내기 시작했고, 그가 24살 때 쓴 "자연철학"이라는 논문은 지금도 그 분야의 고전(classic)으로 간주된다. 그는 학부 수업을 하면서도 담배를 피는 유명한 골초이고,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안 잊어버린다는 사진기와 같은 기억력으로 유명하다. 그는 남들이 1년에 한 편 쓰기도 힘든 연구 논문을, 그것도 수작으로, 1년에 서너편씩 계속 발표한다.

더 신기한 것은 그가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책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낮에는 줄을 서서 그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저녁 4-5시부터 밤 늦게까지는 케임브리지의 이글(Eagle)이라는 맥주집에서 학생들과 함께 매일(!) 술을 마신다. 실제로 주량도 상당하다. 그를 만나려면 학교 연구실이 아니라 "이글"로 가면 된다는 말이 있는데, 나도 케임브리지에 있는 동안 이글에 자주 갔지만 갈 때마다 벌겋게 취해있는 그를 만나고 신기해하곤 했다.

92년 여름에 케임브리지를 잠간 방문하는 동안 섀퍼를 처음 만났었다. 내가 보내준 논문 잘 읽었다고 하면서, 당장 맥주 마시러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오후 세시도 안된 시간이었는데 맥주를 금새 훌쩍 3 파인트 (1,500cc 정도) 마시는 것이 아닌가. 맥주를 마시면서, 내 논문에 대해 질문 비슷한 코멘트를 두 개 했는데, 나는 그 질문을 듣고 혼이 쑥 빠져버리는 기분이었다. 질문이 기가 막히게 예리해서, 그가 이미 내 논문을 한 번 읽고 이에 대해 저자인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새로운 지식을 흡인하는 위력에 내 골수가 다 빨려나간 기분이었다.

그 만남 이후 그에게 배우고 싶어 케임브리지에 무리해서 갔다. 갈 때는 '섀퍼에게 한학기 배우면 참 많이 배우겠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는데, 이는 꿈이었다. 케임브리지에 가보니, 그 밑에서 박사논문을 쓰는 학생만 해도 10명이 넘었고, 거느리고 있는 박사(소위 포닥들)가 5명도 더 되었다. 게다가 다른 대학에서 온 40-50대의 교수들이 그의 수업에 들어가서 흥미있는 얘기를 건져볼까 애쓰고 있었다. 나는 3개월 체류하는 동안 그를 딱 두 번 만났을 뿐이다. 한 번은 20분, 두 번째는 45분 정도 얘기했다. 그의 지도하에 논문을 쓰는 박사과정 학생들이 그를 일년에 두 번 만난다고 하니, 이에 비하면 별로 운이 나쁜 편도 아니었다.

섀퍼보다 더 인상에 깊었던 것은 케임브리지 대학 경제학과에 재직하는 한국인 J교수를 만난 것이었다. 나와 친분이 있는 과학철학자 J박사(지금은 런던대학교수)의 형이었다. 잠간 만나서 같이 점심을 먹었는데, 이 짧은 만남을 통해 큰 자극을 받았다. '한국사람이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로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공부를 얼마나 잘하고 열심히 했으면 저렇게 됐을까 생각하고 그에게 물어봤더니, 그는 그냥 하다보니까 운이 좋았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의 성공 수기>같은 파란만장한 얘기를 바랬던 나로서는 조금 실망이었지만, 영국인들의 자존심이라고 일컬어지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한국교수를 만났다는 사실에 마음이 뿌듯했다.

당시 나는 빨리 박사 논문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갈 생각밖에 없던 때였다. 가족과 친구들이 너무 그리웠다. 그런데 케임브리지에서 가족도 친구도 없이 몇 개월을 지나다 보니, 이것도 그런 대로 살만했다. 게다가 콧대가 높을 대로 높은 케임브리지 대학 학생들이 잊어버릴 때가 되면 내 자존심을 벅벅 긁곤했다. 점차 독기가 올라왔다. "이노무 시키들, 별것도 아닌 것들이 교수 후광을 없고 건방지기는..." 이런 독백은 점차 "그래 한번 붙어보자..."는 오기로 바뀌었다.

토론토로 돌아올 즈음에는, 몇 개월 후에 박사논문을 마치면 귀국하겠다는 계획을 수정하고, 미국에서 포닥(post-doc, 박사후과정)을 따겠다는 것으로 바꾸었다. 자연과학과 달리 과학사같은 인문학분야의 post-doc은 본토박이 애들한테도 쉽지 않은 경쟁이다. 게다가 나는 한국(서울대) 박사에 영어가 엉성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경쟁이 쉽지 않은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도 붙어보기로 했다. 한국 돌아가서 조금 공부한 것 가지고 "박사네"하고 폼 잡고 살기보다, 고수가 득실거리는 곳에서 살아남아 보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한국에 계신 지도교수에게도, MIT로 간 부크왈드 교수에게도 내 결심을 얘기했다. 무엇보다도 잡 마켓(job market)에 나갈 채비를 해야했다. 슈만 상 하나 가지고는 택도 없었다. 논문이 더 있어야 했다. 1993년 여름부터 학위논문을 마무리 지으면서 새로운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경쟁과 기억에 남는 연구들
요즘 학자들은 1960-70년대를 대학교수의 황금기라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 당시 박사학위를 받은 한 평범한 학자 부부는 "뉴욕에 있는 대학에 둘 다 자리를 잡는 조건이 아니면 채용에 응모하지 않겠다"고 생각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단다. 지금은 날고기는 학자가 아닌 이상에 교수 부부가 같은 대학에 자리를 잡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미국의 경우 비행기로 두어시간 떨어진 곳에 부부가 자리를 잡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최근의 또 다른 경향은 취직 연령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60-70년대에는 박사학위를 받기 전에 조교수로 취직해서 강의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제 이런 예는 천연기념물 만큼이나 드물다. 포닥(post-doc)을 2-3년, 아니 이를 4-5년씩 해도 학교에 취직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대학에 취직을 해도, 정규직 조교수가 아닌 2-3년 짜리 임시교수직인 경우가 많다. 한 통계는, 이렇게 임시직을 옮겨 다니는 것이 1990년대 젊은 학자들의 생활 패턴이 되었다고 얘기할 정도다.

간단히 말해서 경쟁이 훨씬 세지고, 또 경쟁하는 기간이 길어졌다는 얘기다. 예전에는 박사학위 논문만 잘 써서 내면 됐는데, 요즘은 학위논문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학위논문은 기본적으로 "학생 대 지도교수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북미의 좋은 대학 중에 교수채용 심사 때 학위논문을 제출하라고 하는 대학도 거의 없다. 무지하게 바쁜 교수들이 심사위원인데, 최종 후보 3-5명의 300-400쪽이 되는 학위논문을 언제 읽고 앉아 있겠는가? 나는 post-doc을 포함해서 총 15곳 정도에 응모를 했었는데, 학위논문을 내라는 요청을 받은 곳은 단 한군데도 없었다.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도 총 12부 만들었다. 이것도 서울대 도서관에 몇부를 제출해야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이 찍은 것이다. 논문 100부씩 찍어서 읽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돌리고, 받은 사람들은 이를 컵라면 뚜껑 눌러놓는 용도로 쓰는 관습도 무척이나 한국적인 것이다.)

제출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학위논문이 아니라 학술지에 출판된 논문들이다. 그러니까 출판된 논문이 없으면, 제출할 서류가 3-4쪽 짜리 이력서 외에는 없는 셈이 된다. 학술지에 출판된 논문을 심사 기준으로 삼는 이유는 분명하다. 학위논문과 달리 학술지에 논문을 출판하는 것은 익명의 심사위원(들)의 까다로운 심사를 거친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사 분야에서 , 는 3명, 는 보통 4명의 심사위원이 논문의 질을 검토한다. (소칼A. Sokal이 엉터리 논문을 실었던 라는 저널은 바로 이런 익명의 심사(blind refereeing)가 없었던 학술지였다.) 게다가 학자들은 자기 분야에서 어떤 학술지가 수준이 높은 것인가를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 과학사 분야에서는 , 기술사에선 가 독보적이다. 이런 학술지는 논문 탈락비율이 90%에 육박한다. 즉 투고된 논문 10편 중, 1편 정도 실린다는 얘기다.

나는 92년에 슈만상을 받았던 논문을 고치고 또 고쳐서 에 출판허가를 받는데 성공했다. 최종 허가를 받을 때까지 1년 반이 더 걸렸다. 그리고 1992년, 1870-80년대에 영국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볼타 전지"의 메커니즘에 대한 격한 논쟁이 있었음을 "발굴"하고 이에 대한 논문을 쓴 것이 있었다. 학위논문을 쓰던 시기였는데, 지도교수는 딴 일 하지 말고 학위논문에 열중하라고 충고했지만, 틈틈이 시간을 내서 긴 논문을 완성시켰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를 라는 학술지에 출판했다.

그렇지만 기억에 남는 연구는 1993년에 조금 예상치 않게 시작했던 초기 무선전신에 대한 것이었다. 미국의 기술사학자 중에 에이켄(H. Aitken)이란 유명한 학자가 있는데, 1975년 란 책으로, 1985년에는 란 책으로 미국 기술사학회가 수상하는 영예로운 "Dexter Prize"를 두 번이나 받은 사람이다. (이를 두 번 받은 사람은 에이켄과 "기술 시스템"(technological system) 개념의 창시자로 유명한 휴즈(Thomas Hughes) 딱 두 사람뿐이다).

케임브리지에서 돌아와서 에이켄의 책을 다시 봤다. 그가 무선전신의 발명가를 마르코니(G. Marconi)가 아닌 영국의 로지(Oliver Lodge) 경이라고 하는 부분을 다시 읽게 되었을 때, 예전과는 달리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에이켄의 책에서 로지는 과학자인 헤르츠와 마르코니의 중간 정도에 위치해서 과학과 전신사업 사이의 "정보의 전달"(transfer of information)을 매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었으며, 바로 그가 1894년 영국과학진흥협회(BAAS)의 옥스퍼드(Oxford) 미팅에서 마르코니보다 1-2년 먼저 무선전신을 시범보인 것으로 기술되어있었다.

마르코니가 무선전신의 창시자라는 얘기는 국민학생도 아는 상식이었다. 에이켄은 이 상식을 깨부순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새로운 사료에 바탕해서 두 가지 흥미 있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었다.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은 런던의 한 대학 도서관에서 "미출판 사료"(archives)를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편지 몇 통이, 에이켄이 제시한 두 가지 증거 중에 첫 번째 것이 잘못된 거짓 증거일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기 때문이었다.

에이켄의 책을 다시 읽으며, 나는 100년 전에 있었던 1894년 옥스퍼드 미팅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밝혀보고자 맘을 먹었다. 그런데 모든 역사적 사건이 그렇듯이, 로지가 1894년 옥스퍼드에서 무선전신을 시범 보였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단편적인 증거의 쪼가리들을 모으고 이를 결합해서 큰 그림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를 가지고 몇 달을 씨름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내 수정주의적인(revisionist) 해석은 에이켄이 틀렸음을, 아니 그가 100년 전 영국 과학자들이 교묘하게 만들어 놓은 함정에(?) 빠졌음을 지적하고 있었다.

문제는 금방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제 '누가 무선전신을 먼저 발명했는가'라는 교양과학신서 수준의 우선권 논쟁이 아니라, 특허, 사료(historical sources)의 의미와 해석, 민족주의, 과학과 기술의 관계, 개인적인 배신감 등이 복잡하게 얽힌 것임이 드러났다. 어느덧 수수께끼가 보다 분명해지고, 당시 마르코니의 첫 무선전신 특허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과 음모(?)의 실체가 뚜렷해졌다. 나는 에이켄이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점점 확신했다. 내 해석은, 로지의 1894년(!) 무선전신이 일종의 "조작"임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없었다. 상대가 누구인가! 날고 긴다는 학자들도 평생 한번 타기 힘든 Dexter Prize를 두 번이나 수상한 대가(大家) 아닌가. 나는 영어도 못해서 쩔쩔매는 박사과정 학생이고...

한참을 망설이다 내 얘기를 논문으로 만들었다. 눈을 딱 감고 이를 에 투고했다. 당시 편집인은 이 논문을 3명의 심사위원에게 보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에이켄 본인이었다. 에이켄을 제외한 다른 두 명은 내 논문에 대해 극찬을 했다. 에이켄은 논문의 저자를 텍사스 대학의 헌트 교수로 오인했는데 (그리고는 영어가 가끔 틀린다고 의아해했는데), 논문의 주장에 대해 상당히 불편해 했다. "해석이 우리가 하는 게임의 룰이라면..." "그는 마르코니의 편..." "나는 아직도 내가 왜 틀렸는지 모르겠다..."는 그의 코멘트로 미루어 보아 그가 내 주장에 설득 당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논문의 출판을 추천했다. 논문을 출판하고 누가 옳은지 독자들이 판단하게 하자는 얘기를 하면서. 나는 그의 학자 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수십 년 존경받는 학자로 살아온 그에 대한 비판이 될지도 모르는 (그것도 심각한 비판일 수 도 있는) 논문을 선뜻 출판하라고 추천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내 논문에 대해 코멘트를 하고 불과 두 달이 안돼서 그는 사망했다. 나는 그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결국 이 소망을 이루지 못한 셈이다. 1994년 미국 기술사학회의 만찬에서 수전 더글러스라는 학자가 그의 조사를 읽었는데,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망해서 충격이 컸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 기분이 씁쓸했다. (그는 1985년 책 이후, 스펙트럼의 역사에 대해 엄청나게 방대한 자료를 축적하던 중이었다. 나는 그 자료를 구경하고 싶어서 하버드대학 교수인 그의 딸에게 접촉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처음엔 내게 무척 호의적이었지만 내가 에 실린 내 논문을 한 부 보내주고 난 뒤에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

1993년 봄에 있었던 학회발표에 기반해서 변압기의 설계를 둘러싸고 과학자와 기술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에 대한 논문을 하나 더 만들었다. 이 논문은 학위논문의 한 챕터에 바탕한 것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1994년 2월 학위를 받았다. 1991년 2월에 토론토에 갔으니까, 만 3년 만이었다. 졸업식에 참석하고 토론토에 돌아와 보니, 칼텍(Caltech)에서 응모한 직장에서 떨어졌다는 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몹시도 어정쩡한 상태로 잡 마켓(job market)에 나왔다. 1992년 슈만 상 수상. 1992년 IEEE 장학금 수상. 출판 허가를 받은 논문 4편. 그중 두 편은 와 에 출판 예정. 그렇지만 이름 없는 대학 (대한민국의 서울대학) 박사학위 소지. 동양인. 국적 한국. 캐나다 시민은커녕 영주권자도 아님. 영어는 간신히 글을 쓸 정도 되지만, 강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이것이 1994년 당시 내 이력서였다.

한편으로 보면 눈에 차는 것도 없을 정도로 지적(知的)으로 무모했고 또 건방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심신이 찢기고, 지치고, 주눅들어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모습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백인 사회에서, 그들의 경쟁에서 한국 대학의 학위를 들고 살아남으려고 버둥거리던, 조금은 슬픈 34살의 자화상이었다.

사족
1993년 내 미래가 너무 불확실할 무렵에, 나의 어머니께서 점을 보셨다. 그 "철학자"(?) 양반이 내가 1994년 7월부터 월급을 타고, 1995년 1월에 교수가 된다고 했다는 얘기를 했단다. 어머니께 제발 점 보는데 돈 쓰시지 말라고 질책 투로 전화통화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포닥(post-doc)이 돼서 첫 월급을 받은 게 1994년 7월이었다. 토론토대학 교수공채에 응모한 게 1994년 9월이었는데, 50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 통지를 받은 것이 1995년 1월이었다. 나는 점을 안 믿지만, 지금도 이를 돌이켜 보면 참 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홍성욱 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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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긴 글인데 다 읽어보게 되었다... 솔직히 읽혔다.
멋지다! 감동적이다! 그리고... 부럽다... 라는 생각..

울 뻔했다.
불안정한 34살의 자화상..

숨이 턱턱 막히는 사람과 함께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다.
수만배의 스트레스로 누를 지라도 말이다.

동감! 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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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그런 젠체하는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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